당신의 시간을 삽니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에게 오늘은 삶의 축복이자 희망과 동의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오늘은 휴일도 없이 매일같이 찾아와 내 숨통을 조여오는 지옥과도 같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나는 미세한 숨소리마저 새어나갈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손가락 한 마디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과도 칼을 움켜쥐고 창문 밖을 주시했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지 못한다면 내일은 기약할 수 없었다.
목숨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은 마라톤이라도 뛴 듯 쿵쾅거리며 두근거렸다.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다독여도 머릿속에선 내 마음과는 반대로 자꾸만 최악의 상황만을 반복하며 예견했고 한번 자리 잡은 부정적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가 깊게 박혀 떨쳐내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긴장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미 손바닥은 긴장감으로 인해 비에 젖어 누수된 천장처럼 땀으로 흥건해졌다. 축축해진 손바닥 탓에 손에 쥔 칼이 자꾸만 미끈거려 연신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다시 칼자루를 쥐어 잡았다. 작디작은 은빛 쇠붙이였지만 머릿속에서 그리던 최악의 상황에 국면 하게 되면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손에 쥔 작은 칼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칼은 나에겐 단순한 칼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이자 석가모니와 진배없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범죄자처럼 숨어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는 내겐 없었다. 창문 쪽으로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커졌고 마른침을 삼키며 불투명 창문을 주시하자 유리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그려졌다. 갑작스러운 그림자의 등장에 너무 놀라 ‘읔’ 소리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소리를 집어삼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창문 밖 그림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지막으로 신의 가호를 빌며 기적이 일어나길 바리 는 것뿐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저들이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돌아가달라며 간청했다.
창밖의 검은 그림자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침없이 창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림자의 윤곽은 점점 선명해졌다. 집 안을 살피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창가에 바짝 들이밀자 정확한 얼굴을 인식하진 힘들지만 어렴풋한 사람 얼굴의 형상이 창문에 조각되어 나타났다. 나는 그 모습이 흡사 내 명부를 쥐고 날 찾아온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 창문 안쪽에서 잠겨있는데? 이쪽으론 확인 못 해.”

다행히도 그림자는 포기가 빠른 남자인 듯했다. 누군가에게 상황을 설명하듯 말하곤 몇 마디의 욕설과 함께 이내 창문 열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창문 주변에 어른거렸기에 완전히 안심할 순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저들과 불과 몇 센티미터의 벽을 사이에 두고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숨이 막혀왔다. 오금이 저릿거렸고 등줄기에선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며 입안이 텁텁해졌고 마른침을 꼴깍거리며 넘어갔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조차 우레와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창문이나 문을 부수고 집을 확인하지 않은 이상에는 집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머릿속으론 알고 있음에도 이론은 이론일 뿐, 내 몸은 머릿속과는 따로 행동했다.
창문이 잠겨 있는 상황을 보고 받은 또 다른 일행 한 명이 문 앞으로 다가와 종잇장처럼 얇은 철문을 두드렸다. 사내의 주먹과 문이 부딪치며 쾅, 쾅 거리는 둔탁한 탁음이 공기 속에 녹아 울려 퍼졌다.

“김창준 씨 계세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약간의 짜증은 섞여 있었지만 반복된 학습에서 나오는 행동처럼 의무적이고 사무적인 말투의 목소리였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사내는 방안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자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문은 사내의 주먹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었다. 몇 차례의 부름에도 그들이 원하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그들은 짜증이 난 듯 욕설을 뱉어냈다.
밖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끓으며 나를 찾는 저들은 사채업자이다. 누군가 나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지체없이 단연 사채업자라고 말할 것이다. 세상의 약자들에게 자신들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구세군처럼 행동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본성이 드러내고 이빨을 으르렁거리는 족속이 저들이었다. 사채업자는 언제나 하나를 주면 열을 취했다.
처음에는 입고 있는 옷을 취했고 옷을 빼앗으면 살가죽을 도려냈으며 더는 자신들이 가질 게 없으면 뼛속에 빨대를 꼽아서라도 먹고 사는 놈들이었다.

저들이 나를 바라볼 땐 돈을 갚지 않는 내가 실패자, 낙오자, 쓰레기겠지만 내 눈에 비치는 저들이야말로 바퀴벌레, 기생충, 인간말종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저들은 무단으로 집 안으로 들어온다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등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행위나 법에 위반되는 행동은 섣불리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본인들 역시 돈의 수금이 어려워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무사할 수 있는 거지만 말이다.
그림자 일행은 집 안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자 자신들이 하던 행동들을 멈추었다. 그제야 철문의 울부짖음도 멈췄다. 적막한 고요가 침묵을 집어삼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주 작은 파동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몇 차례의 우레와 같은 시계 초침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잠시 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탕이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창문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멀어졌다.

“요 며칠 집에 드나드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사내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를 달래듯 동료가 말을 이어받았다.

“다시 잠수탔나보지. 하여튼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다른 건 몰라도 튀는 데는 아주 귀신같다니깐..”
“어차피 우리가 오기 이전에 잠적한 거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일단 팀장님한테는 그렇게 보고 하지 모.”

조금만 더 버틴다면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래딧이 종료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확인 안 해봐도 될까?”
“그러다 괜히 누가 봐서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찍어 먹어봐야 된장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하긴. 그나저나 후딱 잡아야 팔든지 꺼내든지 할 텐데.”
“어차피 이런 새끼들은 밀항도 못해. 결국 숨어봐야 대한민국인데.. 지들이 이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서 지가 숨어봐야 어디로 가겠어. 다시 금방 수면위로 나오겠지. 항상 그래왔잖아?”
“그렇지.”

그들에겐 이 행위가 어린 시절 하던 ‘숨바꼭질’처럼 하나의 놀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술래가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듯 나 역시 술래인 저들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저들이 나를 찾아다니는 형국이었다. 그들은 서로 한참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벌써 6시 넘었다….”
“우리도 마무리하자.”

창가에서 구둣발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지만 정말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사라지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가늠을 할 수 없어 소리가 사라진 뒤로도 한참을 웅크린 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붉게 물들었던 노을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한 어둠이 창문으로 스멀스멀 넘어왔다. 탐욕스러운 어둠은 방을 암흑으로 조금씩 물들이고 있었다. 가구 하나 제대로 없는 텅 빈 방은 고요함과 쓸쓸함, 그리고 공허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방 한구석 널브러진 듯 놓인 액자 속에 지수가 패배감에 젖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수는 언제나 그런 여자였다. 늘 자신보다도 내가 우선이었던 사람. 그런 지수의 마음을 알기에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지수였다. 한때는 나 역시 지수와 함께 미래를 그리며 행복의 날들을 보내는 일반적인 연인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었지만, 그 시절 우린 서로가 서로를 원했고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 사람에 대한 갈증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 역시 바로 지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더 밝은 내일의 미래를 약속하던 우리의 사랑 앞에 끝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유행가의 노랫말 가사처럼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우리의 사랑에도 파국은 찾아왔다.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본디 사랑도 있는 자의 전유물이었다.

어린 시절 내 부모님은 성격 차이를 이유로 별거를 선택하셨다. 곱셈과 나눗셈의 분별도 어렵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별거라는 단어는 쉽게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단어였고 내 인생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망치듯 시골로 거처를 옮긴 엄마를 따라 내려와 살았다. 아버지는 엄마의 빈 자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여자로 채우셨다. 시간이 지나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진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금 당시의 부모님 행동을 복귀해보니 부모님은 별거를 빙자한 이혼을 하신 것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아버지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혼을 강요당하셨을 것이고 엄마는 아버지의 불합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순응하는 여자들의 표상처럼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주셨을 것이다. 다만 지금이야 이혼이 합리적 선택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고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이혼했다는 이유 만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색안경의 대상이 되는 시대였다. 엄마는 자식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흠이 갈까 염려하여 법적으로는 양쪽 부모가 존재하는 별거라는 차선책과 나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의무적이고 주기적인 만남을 합의의 조건으로 요구하셨다. 아버지는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을뿐더러 하루라도 빨리 다른 여자와 살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에 엄마의 요구조건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별거 후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그 다음은 두 달, 다시 그 다음은 6개월…. 몇 번의 만남이 지속될수록 다음에 다시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공백은 길어졌고 만남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의무적이었던 만남에 사랑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나 역시 조금씩 성장해가며 아버지와의 만남이 더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어느 날 더는 아버지를 따로 만나지 않았다.
그 날을 기점으로 나에게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다.
평생을 가정주부로만 살던 엄마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가장이라는 역할로 생업이 뛰어들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기에 온갖 궂은일은 모두 도맡아 하셨다. 엄마는 그 마저도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나를 키울 수 있는 현실에 감사했다. 결국, 고생만 하다 인생의 황금기를 한 번도 맞아보지 못한 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다.
내가 다시 아버지를 본 건 엄마의 장례식장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여자가 아닌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셨다. 장례식장에 걸맞지 않은 진한 립스틱과 눈두덩에 퍼렇고 붉은색으로 펴 발라 흡사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촌스럽고 싼 티 나는 화장, 그리고 온몸에 향수를 들이부은 듯 지나갈 때마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진동하여 속마저 매스꺼운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도 못 가눌 만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모습이 십수 년 만에 본 아버지의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가족들에 의해 그곳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욕설을 들으며 자신의 전리품처럼 데려온 여자와 함께 장례식장을 떠났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까지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신의 행동만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사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추악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몇 년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나에게 아버지는 짙은 흉터와 같았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깊은 흉터. 그게 나에겐 아버지였기에 나는 아버지처럼은 절대로 살지 않겠다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전쟁같이 치열하게 살았다.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살았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축복 같은 지수를 만났다.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지수는 어느 순간 존재만으로 힘이 되었고 삶의 고통도 보상받는 것 같았다. 마음속 깊게 얼어붙은 응어리가 따사로운 햇살에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거지 같은 내 인생에서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였기에 하늘에서 엄마가 보내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천사처럼 순수하며 나를 배려해주는 지수는 내 삶의 봄날이었다.
그러나 너무 행복한 내 모습이 신의 미움을 산 것인지 불행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다. 지수와 만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나에게 아버지의 부고가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내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하며 살았기에 아버지의 상실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부고와 함께 전달된 어려운 용어들과 수많은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 서류였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서류는 원금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10억이라는 빚이었는데 평생 나에게 해준 것 없이 엄마와 나에게 상처만 준 아버지는 본인이 죽으면서까지 내 인생의 암 덩어리였다.

말이 10억이지 평생을 살면서 모아도 만지기 힘든 돈을 아버지는 어떻게 지게 된 걸까?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생 사업이라고는 해본 적 없던 아버지가 여자의 말에 속아 투자만 하면 원금의 3~4배는 무조건 보장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사탕발림에 속아서 사업투자를 결심한 그 순간부터가 불행의 서막이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투자하려는 사업제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 줄 알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최소한의 확인조차 하지 않으셨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것도 최소한의 인생 경험이 뒷받침해줘야 가능한 것인데 평생을 살면서 주색만을 일삼던 아버지에게 그들의 말은 전문지식인의 말이었고 대박으로 향하는 고속열차였다.
다만 아버지의 대박의 지름길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작물을 수확하려고 해도 씨앗이 있어야 심을 수 있듯이 사업을 투자해서 이득을 회수하려면 가장 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 즉 바로 돈이었다. 노동을 신성한 업무의 연장이 아닌 가진 것 없는 상놈들의 일이라고 치부하던 아버지가 제대로 직장을 다니면서 일을 했을 리 만무했고 신용도가 바닥인 건 순리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사채업자의 손길은 벼랑 끝에서 움켜쥔 황금의 동아줄과도 같았을 것이다. 더욱이 높은 사채이율을 한 방에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가 꺼내든 카드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 이었다. 결국 본인의 이름으로 돈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 더욱 많은 돈을 빌리기 위해 법적으론 명백한 직계 가족인 내 이름까지 도용하여 돈을 빌렸다.

삼척동자도 예측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미래는 모두의 예상처럼 투자한 금액은 신기루가 사라지듯 사라졌고 투자자와 투자회사 역시 자취를 감추면서 인어공주의 꿈처럼 아버지의 꿈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 피라미드 사기의 희생양 중 한명일 뿐이었다. 수천 명이 사기를 당했고 사기 금액은 수조에 달한만큼 대규모 투자 사기었다. 규모가 생각보다 크자 사건이 기사화되고 경찰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며 수사가 본격화되자 아버지는 범인을 잡으면 자신이 투자한 금액을 찾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품었다. 그렇지만 도마뱀이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시선을 빼앗은 뒤 도망치듯 경찰의 수사로 체포한 사람은 다단계 회사에서 토사구팽당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가장 말단인 사람만 잡혔다. 당연히 그들은 아버지의 돈에 행방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찾을 수도 없었다. 그 사람들 역시 그들에게 버림받은 부속품에 불과했다.
경찰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은 희망의 불씨마저 사그라져 버리자 매일같이 찾아오는 채무압박에 시달리다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스스로 농약을 마신후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잡은 금싸라기라 생각한 줄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숨결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우둔한 인생에 걸맞은 앤딩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 결과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인생이란 탄환은 아버지의 목숨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사형수의 밧줄은 이제 내 목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가 장밋빛 인생을 포기하며 이혼가정이라는 낙인만큼은 자식에게 주지 않기 위해 선택한 별거가 지금 이 순간 나를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의 손과 같았다.

예전 책에서 본 구절인데 누가 말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은 자유를 팔러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 본인의 자유가 아닌 내 자유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달랐다. 법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직계가족이자 유일한 자식이었고 돈을 빌린 명의자 역시 내 이름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돈에 대한 체납자는 나였다.
파산신청도 생각해 보았지만, 사채꾼들의 돈은 저승으로 도망가도 이자까지 모두 갚아야만 채무가 종결되었기에 내 삶은 파리지옥에 갇힌 작은 벌레였고 궁지로 몰린 쥐와 같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너무나도 많은 게 바뀌었다. 앞으로는 가질 것보다 포기해야 하는 게 많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자 가장 먼저 머릿속에서 떠오른 사람은 지수였다. 빚쟁이의 삶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내 욕심만으로 지수를 불지옥으로 끌어들일 순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수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지수가 나에게 고민하며 이별을 고하기 전 내가 먼저 지수를 놓아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진부하지만 가난과 이별은 떨어질 수 없는 클리셰였다.

예견하지 못한 사채업자의 방문 때문인지 늘 보던 지수의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옛 추억의 기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진 속의 밝은 지수 얼굴을 보니 시궁창 같은 내 삶보다 그녀가 더는 내 삶에 없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도려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웅크려 있었던 탓인지 다리는 뻣뻣해졌고 방안은 완전한 칠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풀려버린 탓에 허기짐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겠다고 배고픔을 느끼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로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핸드폰을 꺼낸 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어두운 액정화면이 백색광을 내며 밝게 빛났다.
강렬한 핸드폰의 불빛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자 동공이 커지며 눈이 찌푸려졌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내 익숙해졌다. 핸드폰의 불빛을 랜턴 삼아 싱크대 문을 열자 삐걱 소리가 나며 싱크대 문이 날개가 펼쳐지듯 열렸다.
그 안에는 며칠 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다 놓은 가장 저렴한 라면 봉지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무리 산해진미도 같은 음식을 먹으면 질리는데 하물며 며칠째 먹는 같은 싸구려 라면이야 오죽할진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이제는 라면 봉지만 봐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초에 선택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자위하며 라면 봉지를 꺼내 열었다.
라면의 구성품 기름에 튀긴 면과 스프하나가 전부였다. 건더기 스프조차 없는 초라한 라면의 구성품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왔다. 그 순간 랜던처럼 쥐고 있던 핸드폰이 자신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내게 연락 올 곳은 사채업자말곤 없었다. 서둘러 다시 몸을 웅크렸다.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온몸을 휘감았다. 너무 놀라 몸이 딱딱하게 굳어 전화번호를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미처 전화번호를 확인하기 전 한참을 울리던 핸드폰은 소명(召命)을 다한 듯 떨림을 멈추자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끄기 위해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찰라 액정에 드러난 부재중 전화번호가 내 시선을 붙들었다.
화면에 찍혀있는 전화번호는 ‘0000-0000’으로 오직 ‘0’번인 단일번호로만 이루어진 전화번호였다. 나는 여태껏 그런 전화번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런 번호도 있네. 인터넷 전화인가?’

일반적인 스팸전화처럼 ‘060’ 이나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이거나 모르는 핸드폰 번호였다면 주저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겠지만 때론 인간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호기심이 발현되기도 했다.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이 그런 순간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처음 보는 전화번호의 궁금증에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호기심은 현실이라는 이성에 의해 기화되어 버렸다.

‘이깟 번호의 궁금증이 내 목숨값보다 비싼건 아니잖아.’

혹여 사채업자자 지금 이 순간 내 핸드폰의 위치를 추적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면 아까와 같은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했다. 황급히 핸드폰을 종료하기 위해 전원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두 번의 스타카토와 같은 짧고 경쾌한 진동이 울렸다. 방금 걸려온 전화번호로 문자가 핸드폰에 전송된 것이었다. 어차피 전원을 종료할건데 문자는 확인해보고 아주 잠깐인데 괜찮겠지 생각하며 결국 문자를 눌렀다.

[당신의 시간을 삽니다.]

‘뭐야. 이 문자는..’

너무나도 상황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문자 내용을 보니 방금전까지 이 전화 때문에 고민하고 긴장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화가 치밀어 결국, 참지 못하고 목구멍 사이로 욕이 새어 나와버렸다. 그 순간 다시 핸드폰이 울렸는데 부재중 전화가 왔던 0번으로만 이루어진 그 번호였다.

‘이 새끼 봐라.’

문자를 보자 배알이 꼴렸다. 전원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빨리 종료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호기심으로 출발한 감정은 격분의 표출구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이 송두리째 변해버린 그 시점부터 늘 참아오고 억압해왔던 내 감정의 스트레스를 발산할 창구가 생기기만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욕설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너 잘 걸렸다.’라는 마음이 들자 상대방이 나에게 조그마한 말이라도 실수한다면 한바탕 쏟아내기 위해 단단히 벼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통해 넘어온 목소리는 중장년의 남성으로 목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면서 묘하게 신뢰감을 주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성문으로 판단했을 때 아주 능숙한 텔레마케터 종사자라고 생각했다.

“김창준씨 되시죠?”

방심하다가 의표를 찔렸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방금까지 폭발하던 감정의 창구보단 불안감이 먼저 파고 들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른 사실은 빚 독촉 전화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 이어졌고 불안감에 창문을 슬며시 열어 밖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찌르르르 거리는 곱등이인지 귀뚜라미인지 알 수없는 소리만 들렸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끊어야 할까? 무작정 전화를 끊어버리면 더 이상해지지 않을까?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컴퓨터 회로가 연산하듯 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돈에 관련하여 ‘ㄷ’자라도 꺼낸다면 이곳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다음 말을 예의 주시했다. 어느새 긴장감으로 땀이 흥건이 베어나왔다.

“누구…….시죠?”
“여기는 ○○○입니다.”
“네?”
“처음 들어보시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당신의 시간을 사고 싶다는 겁니다.”

목소리의 톤이나 말투로 짐작했을 때 장난을 치거나 술에 취해 하는 헛소리 같진 않았다. 일단은 상대방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김창준씨의 시간을 사고 싶다고요. 1시간에 12,000원. 그 가격에 김창준씨의 시간을 매입하겠습니다.”

빚 독촉 전화는 아니었지만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괴상한 말로 상대방의 심리를 자극하고 돈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신종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추측했다. 세 치 혀로 상대방을 현혹하는 남성이 아주 의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귀납적 추론이 보이스 피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다시금 강하게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던 감정이 반발력으로 튕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참아왔던 울분들이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에게 터지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이 제시한 12,000원은 시급으로 계산하면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내 인생에선 당장 사채의 이자도 낼 수 없는 그런 돈이었다.

“정신 차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주둥이 몇 마디로 돈을 벌려고 해. 우리 아버지에겐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난 아냐. 이런 짓 힐 시간에 일을 해. 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해. 네 같은 놈이 그 기분을 알아? 나이 처 잡수시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이름 조사할 시간이 있었으면 조금만 더 조사해보지 그랬냐. 나 1원 한푼 없어. 병신아.”

화를 내며 상대방을 조롱하는 내 모습이 어둠이 짙게 밴 창문의 유리창에 일그러져 비쳤다. 약자에게만 강한 내 모습이 조금은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간 쌓였던 분노를 대리만족이나마 제3자에게 분풀이하니 가슴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더는 상대방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하던 참이었다. 그 순간 핸드폰 속 남성의 한마디가 다시금 날 전화기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김창준씨. 그럼 사채는 어떻게 해결하실 거죠? 정말 장기라도 팔 생각이세요?”

상대방은 이미 내가 빚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속이 혼라스러웠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보이스피싱도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건 뭐지? 혼란스움을 애써 감추며 상대방에게 말했다.

“너 뭐야? 내가 빚이 있는걸 알고도 이러는거면 지금 날 놀리는 거야?”

내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격양되어 있었지만 전화기 속 중년 남성은 처음과 똑같이 차분한 말투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김창준씨, 흥분하시는 거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화내실 상황이 전혀 아니에요. 아까의 무례함은 제가 너그러히 이해하고 넘어가 드리죠. 지금 김창준씨는 오히려 저에게 감사를 해야해요.”
“뭐?”
“전 김창준씨에게 기회를 드리고 있는 거예요. 기회가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기회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남성은 그런 나에게 기회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말하고 있었다. 더욱이 욕설과 조롱을 한 나에게 여전히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날 전화기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회라는 단어가 나를 흥분시키고 이성을 마비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계속해서 남성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조금씩 주도권은 남성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기회?”
“네. 기회요!. 김창준씨가 다시 사람답게 살 기회!.”
“무슨.. 말같지도 않은..”

남성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내 말을 자르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전 사채업자도 아니고 김창준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스 피싱도 아닙니다. 누가 사채를 지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스피싱을 합니까? 이건 김창준씨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죠?”

너무나도 당연한 상대방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해버렸고 한껏 가볍던 입은 못질을 한 듯 단단히 잠겨버렸다.

“저희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의 시간을 구매하는 회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희가 구세주가 되기도 하죠. 지금 김창준씨에게도 말이죠.”
“구세주. 거참 웃기는 단어네. 그런 게 세상에 있긴 하나?”

중년남성은 이번에는 내가 흥분하여 아까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걸 원치 않는 듯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사람들에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세일즈할 기회를 드립니다. 금액이 한 시간에 12,000원이라면 작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하루에 288,000원, 1년이면 105,120,000원, 10년이면 1,051,200,000원이죠. 자 생각해보세요. 이게 정말 기회가 아닐까요?”
“나이드신 양반이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
“못 믿는다는 것 이해합니다. 그러나 김창준씨의 시간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김창준씨는 아직 젊으니까 모든 빚을 청산하면 다시 한번 도약을 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어차피 지금 제 말을 믿어 본다고 해서 더 손해 볼게 남아 있나요?”

기분은 나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중년 남성의 말처럼 더 바닥으로 떨어질 인생도 없었다. 다만 나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고 상대방은 나를 알고 있다는 불편한 관계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고 불합리한 상황이라는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빚을 청산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달콤한 단어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귓가에 맴돌았다.

“장난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내 말은 “진짜요? 정말 그 말이 사실인가요?”와 같은 말처럼 들렸다. 전화기로 쏟아내는 말투와 내 행동은 언행불일치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대방은 내 목소리의 그런 작은 변화도 감지하는 프로였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상대방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쩌면 상대방의 말이 제발 진실이고 정말 이 지옥에서 탈출할 마지막 기회이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나는 이미 전화기 속 중년 남성에게 내 마음을 모두 읽혀버렸다. 그가 내 간절함을 눈치챘다는 것은 이미 승부는 끝났다는 말과 같았다. 도박에서도 포커페이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마음이 모두 들킨 지금의 난 따지면 패착이었다.
중년남성은 다시금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미 그는 그의 말처럼 나에게 구세주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김창준씨가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만 지금 저와 통화가 끝나면 이 시간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연락이 되지도 않습니다. 김창준씨께서 직접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지금의 지옥 같은 인생을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인생을 살 건인지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당신의 시간을 저에게 파시겠습니까?”

분명 헛소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굴레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정말.. 제 시간을 사가고 저에게 돈을 준다고…요?”
“네. 맞습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분풀이의 대상에 불과했던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내 위에 군림하며 상하 관계가 역전되어 있었다.

“그럼.. 저…제가 얼마나 팔 수 있죠?”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계산해보죠. 잠시만요…”

전화기 너머 그의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시간이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모든 신경이 전화기에 집중되었고 마른침이 몇 번이나 넘어갔다. 그 때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김창준씨께서 파실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는 10년입니다.”
“10년.. 그럼 10억정도 인가요?”
“네. 정확히는 105,120,000원 입니다.”

10억이 넘은 돈이면 확실히 모든 빚을 갚고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전부 팔겠습니다. 제 10년.”

아직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내 목소리는 한껏 들떴다.

“알겠습니다. 김창준씨의 시간 10년 계약 완료되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언제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상황은 우습지만 지금 내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마지막까지 손안에 쥐고 있던 자존심마저 내려놓았다.

“근데.. 그럼.. 저는 어떻게 행동하면 되나요? 제가 그쪽으로 찾아가야 하나요?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저희 쪽에서 사람이 갈 겁니다. 그럼 나머지는 저희 직원이 알아서 해 줄 겁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은 뚜뚜 소리를 내고 다시 검게 물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음소거가 된 듯 고요가 찾아오자 ‘돈’이라는 말에 끊어졌던 내 이성의 끈이 다시금 묶이는 느낌이었다.

‘근데 누가 나 같은 패배자의 시간을 사? 게다가 그 보상으로 10억을 준다고?’

이 상황을 스스로 다시 생각해도 미친놈 같았다. 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감언이설 몇 마디에 이렇게 정신이 멍해진 나 자신을 보니 내 몸속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는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랑 통화한 그는 전화를 끊고 내 상황을 비웃으면서 미친 듯 웃고 있을거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갑자기 모든게 서러웠다. 내가 선택하지도 선택한 적도 없는 암울한 내 인생이 누군가에겐 웃고 떠드는 조롱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자신에게 하는 욕은 덤이었다.

“김창준 병신 새끼”

손에 쥔 핸드폰을 있는 힘껏 던졌다. 손에서 떠나 공중을 활강하던 핸드폰은 벽을 향해 비상하다 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폰은 액정의 균열과 함께 바스러졌다. 깨진 액정은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내 모습의 자화상이었다. 그때였다. 단 한 번도 6시가 넘은 이후로 사채업자가 찾아온 적은 없었는데 낡은 철문을 다시금 누군가 두드렸다. 너무 크게 떠들었나? 지금 도망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문밖에서 아까와는 다르게 낯선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김창준씨. ○○○에서 나왔습니다.”

‘뭐야.. 진짜였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짧은 사이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뒤 바뀔수 있는지 새삼 느꼈다. 누군가가 날 놀리기 위해서 저 여자를 보낸 거라면 그건 너무나 정성스럽게 준비한 바보짓이었다. 혹시 몰래카메라는 아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카메라팀이 반드시 필요할 터인데 주변에 사람이라곤 문 밖에 서있는 어린 소녀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고 가정하는게 옳았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10억이라는 현실에 나는 한 발 더 다가간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나이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하지만 고등학생 정도의 상당히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체구보다 큰 서류 가방을 양손에 들고 있는 게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소녀 역시 내 시선을 인지한 듯 나를 향해 시선을 뻗어왔다. 어린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함에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 시선 끝에 소녀가 신고 있는 작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가 신을법한 구두의 디자인이었는데 구두의 앞 코가 둥그렇고 매끈한 검정색 가죽에 포인트로 달린 빨간 리본이 인상적인 구두였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구두였지만 소녀에게 구두는 제법 어울렸다.
소녀는 나를 가볍게 쳐다보고는 마치 몇 번이나 이 집에 와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자 기분 좋은 바닐라 향이 맴돌았다. 나는 그 향이 소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집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양손에 든 가방이 무거운 듯 끙끙거리며 엉거주춤 걸음으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자신보다 큰 가방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발.. 벋어야 되는데..’

소녀의 행동을 보며 바보 같은 생각을 잠깐 했다. 어차피 조금 더 지저분해져도 이상해질 것 없는 집인데 무슨 상관이겠나 싶어 소녀의 행동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방안에 앉아 빠르게 방안을 훑었다. 소녀의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지수의 사진에 잠시 머무르자 사진을 본 소녀는 아주 잠깐이지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금세 다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옛 여인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패배자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잠시 생각하자 소녀의 표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망상을 중지시키건 소녀는 행동 때문이었다. 소녀는 자신보다 커다란 가방에서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서류를 꺼낸 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맑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정말 시간 파실 거예요?”
“네?”

갑작스러운 소녀의 질문에 당황하며 우물거렸다. 한참이나 어린 소녀 앞에서 돈이라는 권력 앞에 굴복한 내 민낯이 보이는 것만 같아 수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아저씨라니. 아직 20대 막바지이긴 해도 30대도 안 되었는데… 난 손등으로 턱을 비비며 까칠하게 자란 내 수염을 머쓱하게 문질렀다. 소녀는 그런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 시간 말이에요. 정말 파실 거냐고요?”
“네. 뭐 돈도 필요하고….” 무언가 중년 남성이 나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저.. 뭘 역시라는 건지…”

소녀는 커다란 서류가방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더니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이건 회사 규칙 위반이지만 말씀드릴게요.”

자꾸만 날 보며 아저씨라 부르는 게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소녀가 말해준다고 하는 규칙이 무엇인지 듣는게 더 급선무였다.

“무슨.. 규칙 위반요?”
“사실. 저희는 고객과 만남에서 서류에 사인만 받고 바로 헤어져야 해요. 그 외의 말은 일절 함구. 쉿!”

소녀는 작고 가느다란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날 바라봤다. 그 상황에서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라 쭈뼛거리자 소녀는 자신의 입에서 검지를 때며 말을 이어갔다.

“잘 듣고 판단하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에요. 시간을 판다는 건 본인의 남은 인생에서 그 시간을 판다는 거예요. 이건 정말 잘 생각하셔야 해요. 이해가 되세요?”

소녀의 앳된 얼굴 때문인지 소녀가 아무리 진지하게 이야기해도 나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 뭐 소녀의 말대로라면 단순 시간이 아니라 내 목숨값이 시간당 12,000원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그 어떠한 것보다 돈이었고 처음부터 저들의 장단만 맞춰주고 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였다.

“네. 그래도 팔게요. 10년.”

내 말을 들은 소녀는 체념한 듯 꺼내놓은 서류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래요. 어차피 말해도 믿지도 않는데..여기에 사인하면 그때부터 바로 아저씨 시간이 매입되는 거예요.”

내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소녀의 시선은 오직 서류에만 향해 있었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소녀가 건넨 서류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혹시 서류에 내가 알지 못하는 장기기증이라던가 신체 포기각서 등 극단적인 조항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에서였지만 서류 내용은 소녀와 중년남성이 이야기한 데로 내 시간을 매입한다는 내용 이외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렇게 두리뭉실한 서류로는 내 노동의 시간을 옭아맬 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서류일 뿐이었다. 난 서둘러 서류에 사인한 뒤 다시 소녀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소녀는 내가 건넨 서류를 건네받곤 서류의 서명을 확인했다.

“근데….. 저.. 돈은요?”

부끄럽지만 둘 사이의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내 말을 들은 소녀는 바라보던 서류를 내려놓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서류가방을 열었다. 가방이 열리자 그 안에는 5만원짜리 묶음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왜 아까 소녀가 그렇게 무거워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소녀는 가방에서 5만 원짜리 묶음을 하나씩 꺼내 자신 앞에 하나씩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금세 돈은 가득 쌓였다. 살면서 그렇게 큰돈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혹시나 꿈인가 싶어 소녀 몰래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악 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소녀는 나를 쳐다봤고 난 민망함에 소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소녀는 그런 날 보고 다시금 가방을 닫으며 말했다.

“원래 1억 이상은 전부 수표로 드리는데.. 제가 현금으로 가져온다고 회사에 이야기했어요. 그래도 만약에 계약하시면 이걸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감… 감사합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세상에 정말 이런 미친놈들이 있구나. 하루빨리 저들의 마음이 바뀌지 전에 빚을 갚고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녀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가방을 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안이 비어져서인지 아까처럼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현 시간부로 김창준씨의 시간 10년 치는 모두 저희 회사로 매입 완료되었습니다.”

소녀는 사무적인 말투를 끝으로 이 집에 있었던 시간 자체가 꿈인 것처럼 가벼워진 커다란 서류 가방을 들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소녀가 떠난 자리엔 노란색 황금의 열매만이 가득했다. 그 어떤 마술보다도 드라마틱한 하루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돈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행복감과 해방감.. 그리고 막연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그녀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꿈..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지수의 사진. 그리고 바닥에 놓여있는 1,051,200,000원이라는 평생을 거쳐도 만져보기 힘든 돈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이 감정은 흥분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환희, 전율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김창준이라는 인간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다.
눈 앞에 놓였있는 돈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까 먹으려던 라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간이 간사한 동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지금껏 포기만 하던 나에게 작지만 상을 주고 싶었다. 술 한잔도 마시며 축배를 들어야 겠다 생각했다. 돈뭉치에서 오만원권 4장을 꺼내 주머니에 찔러 넣고 20만원이면 오랜만에 거하게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머리속도 비우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해봐야 겠다고 다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갑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온도는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무나도 오랜만의 외출이라 더욱 마음은 들떴다. 집 밖을 나서며 이렇게 당당히 집 앞 골목길을 걷는 건 지수와 만나던 그 시절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짙은 어둠은 거리를 집어삼켜 집 앞 골목까지 잠식해버린 탓인지 골목은 상당히 어두웠다. 그나마 외롭게 켜져 있는 주황색 가로등만이 쓸쓸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내일 당당하게 사채 놈들 찾아가서 빚을 모두 청산하고 하루빨리 지수에게 돌아가자. 아직 젊으니까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할 수 있어.’

스스로를 달래며 잠시나마 내 앞에 펼쳐질 핑크빛 인생을 꿈꿨다. 그때 뒤에서 빠르게 나를 향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둔탁한 퍽 소리가 들렸다. 끈적거리며 따뜻한 무언가가 목덜미와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고 나는 바람 빠진 공기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쓰러진 곳을 기점으로 골목길은 서서히 붉은색으로 변했다. 쓰러진 나에게 네댓 명의 학생들이 다가와 주머니를 마구 뒤졌다.

“아. 이 새끼 20만 원밖에 없다. 재수 더럽게 없네.”
“그게 어디야.. 더 있다가는 X 돼. 빨리 가자. 사람 오기 전에..”

내 주머니에서 챙긴 오만원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욱여넣은 뒤 그들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 모습처럼 내 의식 역시 서서히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이제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는데.. 지수에게 당당히 찾아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고 싶었는데..’

허무함, 슬픔, 분노, 서글픔, 고통, 절망 .. 수 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속에 소용돌이쳤고 골목은 어느새 다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골목길 바닥에 쓰러진 내 시야에 낯익은 빨간 리본이 달린 검정 구두가 보였다. 내 앞에 멈춰 선 빨간 리본의 구두는 깊은 한숨을 내 쉬더니 날 향해 말했다. 멀어져가는 의식속에 희미하지만 소녀의 음성이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가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했잖아요. 아저씨, 남은 수명이 딱 10년이었다고요. 아저씨가 사랑했던 그 언니 말이에요. 아저씨 책상 위에 있던 사진 속 언니요. 그 언니도 아저씨가 빚이 있는 걸 알고 도와주려고 자신의 시간을 팔았어요. 물론 그 언니도 자신의 시간을 모두 다 팔아버린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사진을 본 순간 아저씨만큼은 같은 실수를 안 하길 원했는데..”

내가 시간을 판다고 했을 때 어린 소녀의 슬픈 눈빛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깨닫기엔 지금은 너무 늦어버린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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